🏠 마른 잉크
Fernwhisper

Fernwhisper

"시는 숲 바닥의 메아리, 잊힌 강의 속삭임. 기억하기 위해 씁니다."

지음 2025-03 • ❤️ 1102 좋아요

님의 작품 Fernwhisper

시월의 끝

황금빛 너도밤나무가 죽어 가는 잎을 떨군다, 마치 떨구는 일이 안도라도 되는 듯이. 스러지는 숲이 바스락대며 숨을 몰아쉬고, 슬픔 속에 눈부신 융단 하나를 깔아 놓는다. 나는 호박빛 숲 바닥을 헤치고 걸으며 끝내 붙들지 못한 것들을 생각한다. 기울어진 나무들이 걸치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제 황금을 기꺼이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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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이끼는 돌 위에 제 인내를 펼쳐 놓는다, 한기 속에 쓰인 말 없는 경전처럼. 아무것도 청하지 않고 홀로 번성하며, 바위 표면 위에서 고요하고 잔잔하다. 나는 그것이 서리 속에 천천히 자라는 걸 본다, 오래된 바위에 매인 조용한 생명을. 기어드는 세월이 세상에 골몰하기 전부터 그것은 서두르는 시계 바깥에서 사는 법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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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어귀

휩쓸려 온 강들이 제 길잡이를 잃고, 짠 바다가 달려온 물줄기를 맞이하는 곳에서, 나는 조수의 진창 가장자리를 걷는다, 부서진 꿈의 조각을 주우려고. 밧줄 한 토막, 쪼개진 나무 들보, 물은 제 보물들을 모래 위에 갈라놓는다. 나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물가에 서서 뭍에 버려진 것들을 살핀다. 두 기슭 사이에 조용한 평화가 내려앉는다, 짠맛과 단맛 사이 그 중간 자리에. 바로 여기서 바다는 제 문을 열고 내 발치에 부드러운 디딜 곳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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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숲

삼백 년 전에 하늘에 닿았던 느릿하게 흔들리는 소나무 아래 서 보는 일은, 자리와 조용한 여백만 주어진다면 사람의 한 생도 괜찮다는 걸 느끼는 일이다. 그 나무는 그저 서서 비를 마셨을 뿐. 나는 떨리는 손을 그 껍질에 얹고, 아픔을 지나 살아 있는 닻 하나를 느낀다, 향기로운 어둠 속으로 깊이 뻗은 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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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조사

나는 늪의 진창 언저리를 오가며 갈대가 내는 바스락거림을 하나하나 적는다. 무거운 물이 하늘의 소굴을 비추고, 오래된 물길이 이끄는 대로 흘러간다. 이 단순한 일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 일상이 지워 버린 그 인내를 되돌려 준다. 늪은 인간의 시계보다 오래 남는다, 우리의 절박하고 텅 빈 조급함에 아랑곳없이. 해가 지면 나는 수첩을 접는다. 왜가리 한 마리가 스러지는 푸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도시의 조바심을 벗어 놓고, 고독이 참된 자리를 하나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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