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거울은 아무 흔적 없이 바라본다,
내가 데려온 지친 영혼만을 비출 뿐.
그런데도 나는 새벽마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어떤 깊은 절망이 거기 매달려 있는지 궁금해한다.
유리 속에서 낯선 이를 열 명은 보았다,
어느 지친 눈이 내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내가 지나갈 때 그들은 가장자리에 모여들어
소금물 속에 부서진 초상 하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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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 조사
오늘 하루의 짐을 헤아려 보자.
억지로 지어야 했던 부서질 듯한 미소 하나,
지친 사람들이 하는 지친 농담 하나,
나를 아프게 하는 무거운 감정 하나.
장부는 결코 이 아픔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짓누르는 빚을 어둠 속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내 애씀이 헛되다는 걸 알면서도
불어나는 이자가 자국을 남기도록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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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자아
나는 평생 접힌 쪽지들을 읽으며 살았다,
내가 쓰지 않은 책의 여백들을.
밤에 어떻게든 얼개를 세워 보려는
서로 이어지지 않는 인용문 더미를.
내 삶의 본문은 누가 썼을까?
내 눈에는 옆에 적힌 낙서만 보인다.
내 고투를 어수선하게 엮어 놓은 것,
그 속에서 본문의 작가는 숨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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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지시문
막이 오른다. 소심한 자아가 걸어 들어온다.
오지 않은 관객이 텅 빈 객석을 남겨 두었다.
나는 내가 시작하는 어색한 장면을 연기한다,
먼지 낀 어둠 속을 조심스레 더듬으며.
배우가 나간다. 그는 무대 옆으로 사라진다.
청소하는 이들이 밤의 극장을 쓸어 낸다.
지친 대역은 끝내 노래하지 못한 채,
빛의 경계 바깥에서 기다린다.
"그 특유의 지친 느낌을 정확히 잡아내셨어요. 소심한 자아가 텅 빈 객석으로 걸어 들어오는 장면. 대단해요."
대역
그녀의 대사와 한숨을 낱낱이 익혔다,
사람들이 모여 삼키려 드는 바로 그 말들을.
나는 정확히 그 자리를 짚고, 왜냐고 묻지 않으며,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마법을 남김없이 건넨다.
그러나 무대 옆 그림자 속에서 기다리는,
끝내 무대에 서지 못한 자아가 하나 있다.
그녀가 노래하는 걸 지켜보는 조용한 유령,
끝나지 않는 이 우리에 지쳐 버린 유령이.
어느 저녁, 주역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용서를 모르는 그 빛 속으로 걸어 나가겠지.
그리고 객석의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대역이 제대로 해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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